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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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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편집]

파리 강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 1919년 1월 18일 ~ 1920년 1월 2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전후 국제 질서의 재편과 승전국과 패전국 간의 사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대규모 국제 회의이다. '세계 평화와 정의'를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실상은 영·프·미 등 승전 열강들의 철저한 이권 다툼과 패전국에 대한 가혹한 징벌이 중심이 된 회의였다. 이 회의의 결과물로 베르사유 조약을 비롯한 수많은 전후 처리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인류 최초의 국제 평화 기구인 국제연맹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상세[편집]

회의는 프랑스 외무부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등지에서 진행되었으며, 전 세계 30개국 이상이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실제 의사결정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 등 소위 '빅 4(Big Four)'에 의해 독점되었다. 특히 패전국 독일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부과하고 영토를 전방위로 압수하는 가혹한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훗날 독일 내 복수심을 자극하여 제2차 세계 대전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는 불씨가 되었다. 동시에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이는 철저히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한계를 지녔다. 승전국인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3·1 운동이나 승전국 열강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 등의 독립 요구는 철저히 묵살당했다. 또한 중국의 산둥반도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결정을 내려 중국 내에서 5·4 운동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는 등, 약소국과 식민지 민족들에게는 열강들의 잔혹한 현실정치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 회의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