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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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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민족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했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함께 대일 항전을 준비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해방 이후에는 한반도의 분단을 막고 통일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헌신했으나 안타까운 시해로 생을 마감했으며,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겨레의 큰 스승'이자 민족의 횃불로 존경받고 있다.

2. 생애[편집]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창암이었으며, 청년 시절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접주로 활약하기도 했다. 치하포에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처단한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탈옥했고, 이후 이름을 김구(金龜, 후에 金九로 개명)로 바꾸고 교육 공립 운동과 신민회 활동을 통해 구국 운동을 전개했다. 105인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버텨낸 후 출옥하여 농촌 계몽 운동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처하며 경무국장, 내무총장 등을 거쳐 국무령에 취임했고,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1931년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이를 통해 이봉창 의사의 도쿄 의거,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지휘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렸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를 이끌고 이동하며 대일 항전을 지속했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조국 진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1948년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명문을 발표하고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남북 각각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사망했다. 유해는 국민장으로 치러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